지금 돌아보면
중학교 때였다.
동네 친구가 패미컴을 갖고 있었고, 거기 꽂혀 있던 게임팩 중 하나가 파이널 판타지 3이었다. 한글화는 당연히 없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채로, 그림과 소리와 감으로만 플레이했다.
이상한 건, 그게 더 재밌었다는 거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NPC의 대사를 해석하려고 혼자 상상하고, 맵 곳곳을 뒤지면서 "여기 뭔가 있겠지"를 반복했다. 지금처럼 공략 유튜브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니까. 동네 친구한테 물어보거나, 운 좋으면 공략집을 빌려보는 게 전부였다.
FF3부터 FF6까지 네 작품을 중학교 시절에 모두 클리어했다. 그때의 기억을 지금 여기 꺼내 놓는다.
FINAL FANTASY III — 패미컴 (1990)
처음 켰을 때
패미컴 특유의 게임팩. 블로우(후후 불기)를 두 번 하고 꽂으면 타이틀 화면이 뜬다. 그 음악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4명의 주인공이 동굴에서 깨어나는 오프닝.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당시 중학생 특유의 감수성으로 이름을 다 별명으로 지었다가 나중에 후회했던 기억이 있다.
잡(Job) 시스템 — 처음 만나는 직업 선택의 자유
FF3의 핵심은 잡 시스템이다. 파이터, 몽크, 화이트메이지, 블랙메이지, 레드메이지... 각자 특성이 다른 직업들 사이에서 파티를 구성하는 게 재미의 핵심이다.
문제는 초반에 이게 뭔지 몰랐다는 거다.
나는 처음에 4명 다 파이터로 만들었다. "제일 세 보이니까." 그게 오판이었다. 물리공격만으로 초반을 버티다가 첫 번째 제대로 된 보스에서 막혔다. 회복수단이 없으니 마을로 돌아가는 루트를 계속 반복했다.
며칠 고민하다가 화이트메이지를 한 명 넣기 시작했다. 그게 게임을 바꿨다. 케어 한 방이 이렇게 소중한 거구나를 몸으로 배웠다.

사비나 사막과 물속 던전
잡 시스템이 강제로 발동되는 구간이 있다. 물속 던전이다.
특정 구간에서 파티가 미니 상태로 줄어들어야만 통과할 수 있고, 그 상태에서 싸워야 한다. 미니 상태에서는 무기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공략집 없이 여기서 한참을 헤맸다. "왜 갑자기 캐릭터가 작아져?" 하면서.
결국 방법을 찾았다. 블랙메이지를 메인으로 세우는 것. 마법은 미니 상태에서도 위력이 유지된다. 그 발견이 소소하게 뿌듯했다.
이후 등장하는 비행정 던전 계열도 난관이었다. 지도도 없고, 세이브 포인트도 없이 긴 던전을 탐색하는 구조다. 아직도 그 긴장감이 생각난다. 세이브 포인트를 못 찾고 전멸할까 봐 조마조마하며 플레이하던 그 느낌.

도가와 우네 — 처음 받은 JRPG의 감동
파이널 판타지 3에서 처음으로 JRPG 특유의 감동을 받았다.
도가와 우네. 두 마법사가 파티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스스로 적으로 변해 싸워달라고 한다. 일본어를 몰라도 그 장면의 분위기는 느껴졌다. 캐릭터들의 도트 스프라이트가 떨리는 연출에, 중학생인 나도 뭔가 찡한 느낌을 받았다.
적으로 등장한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 나서 얻는 마법들. "이분들이 목숨을 내놓은 거구나"가 게임 안에서 느껴졌다. 그게 인상적이었다.
최종 던전과 어둠의 구름
FF3의 최종 던전은 무자비하다.
세이브 포인트 없이 5개 층을 내려가야 하고, 마지막 보스 앞에서 연속으로 보스를 상대해야 한다. 도중에 전멸하거나 게임을 끄면 처음부터다.
나는 이 구간에서 두 번을 실패했다.
첫 번째는 회복 아이템이 부족했다. 최종 보스 직전에 엘릭서를 다 썼다.
두 번째는 레벨이 낮았다. 파이널 보스 어둠의 구름의 광선 공격이 파티를 2방에 갈아버렸다.
세 번째 도전에서 방법을 바꿨다.
- 세이지와 닌자 육성 — 게임 후반 해금 직업. 희귀 아이템 각 1개로만 해금 가능해서 신중하게 써야 한다
- 세이브 포인트에서 회복 아이템 최대로 채우기
- 진입 전 레벨 45 이상 확보
어둠의 구름을 쓰러뜨렸을 때, 그 엔딩 크레딧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패미컴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였지만, 그 순간은 진짜 짜릿했다.

FF3 총평
| 항목 | 평가 |
|---|---|
| 스토리 | ★★★☆☆ — 캐릭터가 희박하지만 감동 포인트는 있음 |
| 시스템 | ★★★★☆ — 잡 시스템의 원형, 지금도 훌륭한 설계 |
| 난이도 | ★★★★★ — 최종 던전은 현재도 악명 높음 |
| 음악 | ★★★★☆ — 노부오 우에마츠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 |
FINAL FANTASY IV — 슈퍼패미컴 (1991)
슈퍼패미컴과의 첫 만남
FF3을 클리어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패미컴이 생겼다. 당시에 그 기계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화면이 다르다. 색이 다르다.
FF4의 오프닝에서 세실이 이끄는 비행선단이 마을에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작과는 달랐다. 주인공이 처음부터 악역의 편에 있다.
"이건 다르다" 싶었다.
ATB — 시간이 흐르는 전투
Active Time Battle(ATB) 시스템이 처음 도입된 작품이다.
이전까지는 턴이 돌아올 때 명령을 입력하면 됐다. FF4부터는 게이지가 차야 행동할 수 있고, 적도 그 사이에 공격한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했다. 명령 선택하다가 갑자기 적한테 맞고, 허둥지둥하다 파티가 전멸하는 경험을 초반에 몇 번 했다.
그런데 익숙해지니까 전투가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전작의 정적인 턴제와는 확실히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

캐릭터가 죽는다 — 진짜로
FF4에서 처음 경험한 것 중 하나가 파티 멤버가 스토리상으로 죽거나 이탈하는 것이다.
팔롬과 포롬. 두 쌍둥이 마법사가 일행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돌로 변한다. 일본어를 몰라도 그 장면은 이해가 됐다. 슈퍼패미컴의 표현력으로 담아낸 그 연출이, 당시 중학생에게는 진짜 충격이었다.
양. 카이나초에서 폭탄을 막기 위해 혼자 남는 장면.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텔라. 원수를 갚기 위해 메테오를 쓰고 쓰러지는 장면. 메테오 시전 전에 흘러나오는 음악과 대사가 맞물리는 그 연출을, 일본어 모르고 봤는데도 무슨 장면인지 알았다.
파티 멤버가 오고 가는 구조였는데, 이게 처음엔 불편했다. "아니 왜 또 바뀌어?" 하면서.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게 스토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카인의 배신
카인. 세실의 절친이자 드라군 전사.
그가 중반부에 배신한다. 처음에 나는 "게임 버그인가?" 했다. 분명 같은 편이었는데 갑자기 적이 된다. 공략집도 없이 플레이하다 보니 이게 스토리의 일부인지조차 처음엔 몰랐다.
적으로 등장한 카인과 싸울 때, 그 배경음악이 달랐다. "이건 일반 적이 아니다"라는 걸 음악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FF 시리즈가 음악으로 분위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FF4에서 처음 제대로 느꼈다.
골베자 — 이길 수 없는 적
텔라가 메테오를 쓰고 쓰러지는 장면 직전에 골베자와 싸우는 이벤트 전투가 있다. 이건 이길 수 없는 전투다.
당시 나는 몰랐다. 진짜로 이기려고 죽어라 아이템을 쓰면서 버텼다. 물론 이벤트 전투라서 어떻게 해도 패배한다. 그걸 한참 뒤에 알았다.
그때 쓴 엘릭서가 너무 아까웠다.
달과 지하 던전
FF4의 후반부는 달로 간다. 로켓을 타고 달에 착륙하는 연출에서, 당시 중학생으로서는 스케일에 압도됐다.
달 지하 던전(Lunar Subterrane)은 당시 기준으로도 꽤 어려웠다. 랜덤 인카운터 빈도가 높고, 보스들이 버프/디버프를 자유롭게 쓰는 구조라 케어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국면이 자주 왔다.
이 구간에서 발견한 공략은 로자의 슬로 마법이었다. 강력한 보스에게 슬로를 걸면 행동 빈도가 줄어든다. ATB 게이지가 느리게 차니까 피아의 격차가 벌어진다. 이 방법을 혼자 발견했을 때 꽤 뿌듯했다.

제로무스
최종 보스 제로무스는 처음엔 무적 상태다. 크리스탈을 사용해야 비로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구조.
공략집 없이 이걸 몰랐다면 막혔을 게 분명하다. 운 좋게 이 힌트를 플레이 중에 어떤 NPC에게서 얻었다. 크리스탈이 인벤토리에 있는 걸 보고 "혹시?" 하며 써봤더니 발동됐다.
제로무스의 빅뱅 공격은 전체에게 큰 피해를 주는 기술이다. 이게 올 때마다 파티 전멸의 공포가 있었다. 엘릭서를 아껴가며 타이밍 맞춰 회복하는 패턴을 익히는 데 두 번의 도전이 걸렸다.
클리어 후 엔딩에서 카인이 홀로 달을 향해 걷는 장면. 그 여운이 오래 남았다.
FF4 총평
| 항목 | 평가 |
|---|---|
| 스토리 | ★★★★★ — 시리즈 내에서도 손꼽히는 감동 |
| 시스템 | ★★★★☆ — ATB 도입, 전투의 긴장감 완성 |
| 난이도 | ★★★★☆ — SFC 오리지널 버전은 꽤 가혹 |
| 음악 | ★★★★★ — 카인의 테마, 텔라의 테마 등 명곡 다수 |
FINAL FANTASY V — 슈퍼패미컴 (1992)
"잡 시스템이 돌아왔다"
FF5는 처음 접했을 때 "FF3이 돌아왔다"는 인상이었다. 잡 시스템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FF3의 잡 시스템과는 급이 달랐다. ABP(Ability Point)를 쌓아서 각 직업의 능력을 배우고, 그걸 다른 직업에 세팅할 수 있다. 화이트메이지가 나이트의 방어 기술을 쓰거나, 블랙메이지가 기사의 장비를 착용하는 식의 조합이 가능해졌다.
이 시스템을 처음 이해했을 때, 게임의 깊이가 전혀 달라 보였다.

바츠 — 가장 가볍고, 가장 따뜻한 주인공
FF4의 세실이 무거운 죄의식을 짊어진 주인공이었다면, FF5의 바츠는 가볍고 낙천적이다. 말도 쉽게 하고, 파티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중학교 때는 그냥 "이 주인공 성격 좋네" 정도였는데, 돌이켜보면 바츠라는 캐릭터가 FF5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핵심이었다. 시나리오가 무겁지 않고, 모험의 즐거움을 중심에 두는 방향성이 바츠의 성격과 잘 맞았다.
길가메쉬 — 시리즈 최고의 조연
길가메쉬. 이 캐릭터를 처음 봤을 때 그냥 적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의 신전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혼자서 떠들다가 파티에게 지는 익살스러운 악당이었다. 그런데 계속 만날수록 캐릭터에 정이 붙었다. 잡몹 취급받는 게 본인도 속상한 듯, 매번 "다음엔 진짜다!"를 외치다가 또 진다.
길가메쉬와의 마지막 전투. 엑스데스가 그를 허공으로 추방하는 장면에서, 길가메쉬가 파티를 도우며 사라진다. 일본어를 몰라도 그 장면에서 뭔가 느껴졌다. 지금 다시 보면 확실히 명장면이다.
케미스트의 믹스
FF5 잡 시스템 중 가장 사기적인 직업이 케미스트다.
케미스트의 고유 능력 믹스는 두 가지 아이템을 섞어 강력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 조합이 200가지가 넘는다. 공략집 없이 혼자 발견한 조합들이 있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에테르 + 에테르 = 터보에테르였다.
더 강력한 조합은 영웅의 물약 계열이다. 전 파티의 능력치를 대폭 올려주는 믹스인데, 이걸 발견했을 때 "이게 게임이 맞나?" 싶었다. 최종 보스 공략이 이 조합 하나로 상당히 쉬워졌다.
타임 메이지와 X-매직
잡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건 타임 메이지였다. 헤이스트로 아군 ATB 게이지를 빠르게 만들고, 슬로우로 적을 느리게 만드는 전략이 체계화됐다.
후반에 X-매직(연속마)과 조합하면 한 번의 행동으로 마법을 2번 발동할 수 있다. 이걸 처음 발견하고 강력한 보스에게 써봤을 때, 순식간에 보스가 녹아내리는 걸 보고 혼자 환호했던 기억이 있다.

엑스데스 — 나무다
FF5의 최종 보스 엑스데스는 사실 나무다.
그것도 악의 힘이 모인 고목. 이 설정이 처음엔 황당했다. "최종 보스가 나무야?" 근데 게임을 진행하면서 보면 이 설정이 나름 맞는다. FF5에서 등장하는 허공(공)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면서, 엑스데스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세계 자체를 무(無)로 돌리려는 존재가 된다.
네오 엑스데스. 최종 전투에서 엑스데스가 허공에 흡수되어 괴물로 변하는 폼이다. 이 형태에서 사용하는 공격들이 불규칙하고, 파티 중 한 명을 순삭하는 앨마게스트라는 기술이 있다.
앨마게스트 직전에 반드시 회복한다는 패턴을 익히는 데 두 번의 도전이 걸렸다. 타이밍 게임이었다.
FF5 총평
| 항목 | 평가 |
|---|---|
| 스토리 | ★★★☆☆ — 캐릭터 매력은 높지만 시나리오는 비교적 단순 |
| 시스템 | ★★★★★ — 잡 시스템의 완성형, 지금 해도 재밌음 |
| 난이도 | ★★★☆☆ — 시스템을 이해하면 쉽고, 모르면 어렵다 |
| 음악 | ★★★★★ — 바람의 신전, 길가메쉬의 테마는 명곡 |
FINAL FANTASY VI — 슈퍼패미컴 (1994)
이건 차원이 달랐다
FF6을 처음 켰을 때, 오프닝 연출에서 멈칫했다.
눈 덮인 마을을 향해 마법 장갑(마기텍 아머)을 입은 세 명의 병사가 걸어오는 장면. 그 연출의 음악이 지금까지도 FF 시리즈 최고의 오프닝 음악으로 회자된다. 슈퍼패미컴 사운드 칩으로 만들어낸 음악의 완성도가 달랐다.
세 명 중 한 명이 티나다. 마법을 강제로 사용당하는 소녀. 이 캐릭터의 배경이 오프닝부터 짙게 깔린다.

캐릭터가 14명
FF6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14명이다. 당시 기준으로 충격적인 숫자였다.
각자 고유한 능력이 있다.
- 티나: 에스퍼 형태로 변신, 마법 자동 습득
- 록: 도적 기술, 적의 아이템 훔치기
- 세리스: 마법 흡수, 스토리 후반의 주인공
- 마쉬: 격투 명령 블리츠, 버튼 커맨드 입력
- 섀도우: 수리검, 혼자 이탈하는 미스터리 닌자
- 가우: 몬스터의 기술을 쓰는 야생아
- 카이엔: 검도 기술 부시도
- 모그: 춤 기술
- 우마로: AI 제어, 자동 전투
- 고고: 아군의 명령을 모방하는 흉내쟁이
이 중에서 마쉬의 블리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격투게임처럼 방향키와 버튼을 입력하면 강력한 기술이 나온다. 처음엔 커맨드 입력이 익숙하지 않아서 실패가 잦았지만, 익숙해지면 전투의 쾌감이 다르다.
오페라 장면
FF6에는 오페라 장면이 있다.
세리스가 오페라 무대에 올라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 슈퍼패미컴이 음성을 출력할 수 없으니, 사운드 칩으로 재현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화면의 연출로만 표현한다. 그런데도 당시 중학생에게 그 장면은 진짜 뮤지컬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도중에 마스코비처라는 쥐가 오페라를 망치려고 방해하는데, 이걸 막는 미니게임도 있다. 대사를 외워서 틀리지 않아야 하는데, 일본어를 모르니까 처음엔 완전히 찍어야 했다. 틀릴 때마다 오페라가 망가지는 연출이 나왔고, 그 결과가 보기 싫어서 여러 번 재도전했다.

케프카 — JRPG 역사상 가장 성공한 빌런
케프카 팔라초.
이 캐릭터는 특별하다. 단순히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악당이 아니다. 케프카는 실제로 세계를 망가뜨리는 데 성공한다.
FF6의 중반부에 케프카가 세계를 개편해버리는 장면이 있다. 그 후 게임은 붕괴된 세계(World of Ruin)로 이어진다. 주인공 파티도 각지에 뿔뿔이 흩어진다.
이 구조가 당시 정말 충격이었다. RPG에서 주인공이 막지 못하고 빌런이 목표를 이루는 전개. "이게 실패한 건가?" 싶었지만, 이후 게임은 흩어진 동료를 다시 모으며 케프카에게 복수하는 구성으로 이어진다.
케프카는 권력도 탐하고, 남을 괴롭히는 걸 즐기며, 세계를 허무주의적으로 보는 인물이다. 기존의 RPG 빌런처럼 "나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가 아니라, "의미 없어, 다 태워버려"에 가까운 캐릭터다.
이 캐릭터가 JRPG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빌런 중 하나로 지금도 언급되는 건 이유가 있다.
세리스의 각성 — 붕괴 후 세계에서
세계 붕괴 후, 티나가 사라진다. 잠시 동안 세리스가 사실상의 주인공이 된다.
홀로 섬에서 깨어난 세리스가 늙은 시드를 간호하는 장면. 물고기를 잡아서 먹이고, 시드의 상태에 따라 엔딩 분기가 달라진다. 시드가 죽으면 세리스가 절망해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이 나온다.
공략집 없이 처음 플레이할 때, 시드를 살리는 방법을 몰랐다. 상태가 좋은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데 그걸 몰라서 시드를 죽게 뒀다. 세리스가 뛰어드는 연출에서, 게임을 잘못 진행한 건지 스토리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중에 시드를 살리는 루트를 알고 다시 해봤을 때, 그쪽이 훨씬 희망적인 전개로 이어졌다.
섀도우의 진실
섀도우는 파티 합류를 거부하다가 이탈하기를 반복하는 미스터리한 닌자다.
그의 과거가 꿈 이벤트를 통해 단편적으로 공개된다. 이 꿈 이벤트가 언제 뜨는지는 숙박 타이밍에 달려 있다. 공략 없이 자연스럽게 다 보기는 어렵다.
섀도우의 과거를 다 보면, 그가 왜 그렇게 사람을 밀어내는지가 이해된다. 그리고 최후의 던전에서 그를 기다리는 선택지가 나온다. 반드시 기다려야 섀도우가 생존하는데, 당시 나는 그 타이밍을 놓쳐서 섀도우가 최후의 던전에서 사라졌다.
그게 너무 아쉬워서 나중에 다시 플레이했다.
마지막 던전 — 케프카의 탑
최종 던전 케프카의 탑은 세 갈래 루트로 나뉘어진다. 파티를 3팀으로 나눠 각 루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구조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파티를 적절히 분배하지 않고 강한 캐릭터를 한 팀에 몰아넣었더니, 나머지 팀이 중간 보스에게 막혔다. 파티 구성을 다시 짜야 했다.
이 던전의 구조 자체가 FF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도 독특하다. 보스들이 합체해 더 강한 형태로 변하는 연출도 있고, 최종 보스까지 가는 루트에 BGM이 계속 바뀌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케프카 — 최종 전투
케프카와의 최종 전투는 4단계로 나뉜다.
조각상들이 합쳐지며 케프카의 진짜 형태가 등장하는 구조인데, 각 단계마다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마지막 형태의 케프카가 사용하는 심판의 빛은 전파티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 이걸 받기 전에 배리어와 미러 상태를 유지하는 게 핵심이었다.
케프카를 쓰러뜨리고 흘러나오는 음악 "기쁨과 슬픔"(Balance is Restored). 그 음악과 함께 세계가 서서히 복원되는 장면. 흩어진 동료들이 탈출하는 연출.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화면이 꺼질 때, 중학생이었던 나는 한동안 게임팩을 내려놓지 못했다.
FF6 총평
| 항목 | 평가 |
|---|---|
| 스토리 | ★★★★★ — 시리즈 역대 최고 수준의 각본 |
| 시스템 | ★★★★☆ — 에스퍼 마법 시스템, 캐릭터별 고유 능력 |
| 난이도 | ★★★☆☆ — 시스템을 알면 중간 수준 |
| 음악 | ★★★★★ — 노부오 우에마츠 커리어 최고작 중 하나 |
4작품 비교 — 어떻게 달라졌나
| 항목 | FF3 (패미컴) | FF4 (SFC) | FF5 (SFC) | FF6 (SFC) |
|---|---|---|---|---|
| 하드웨어 | 패미컴 | 슈퍼패미컴 | 슈퍼패미컴 | 슈퍼패미컴 |
| 주인공 | 이름 없는 4인 | 세실 | 바츠 | 티나 / 세리스 |
| 전투 | 턴제 | ATB 도입 | ATB | ATB |
| 핵심 시스템 | 잡 시스템 | 캐릭터 교체 | 잡 + 어빌리티 | 에스퍼 마법 |
| 스토리 비중 | 낮음 | 높음 | 중간 | 매우 높음 |
| 플레이어블 수 | 4명 고정 | 다수 교체 | 5명 (+α) | 14명 |
| 빌런 | 어둠의 구름 | 제로무스 | 엑스데스 | 케프카 |
| 특징 | 어려운 최종 던전 | 감동적인 희생 | 자유로운 육성 | 세계 붕괴 |
지금 다시 한다면
가끔 앤버닉 같은 레트로 게임기로 이 시리즈를 다시 돌린다.
화면이 좋아져서 도트가 선명하게 보이고, 세이브 스테이트 기능으로 언제든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다. 근데 묘하게 그게 아쉬울 때도 있다. 세이브 포인트까지 달려가면서 느끼던 그 긴장감이 없으니까.
중학생 때는 몰랐던 대사들이 지금은 이해된다. 텔라의 마지막 대사, 팔롬과 포롬의 자기희생, 케프카 팔라초의 허무주의 독백. 일본어를 알고 나서 다시 하니까 완전히 다른 게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일본어도 모르고, 공략집도 없이 클리어했던 그때의 기억이 제일 강하다.
그게 게임이 줄 수 있는 경험의 진짜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가 궁금하다면 FF6부터 권한다. 지금 해도 충분히 재미있다.